편지를 쓰다.
글쓴이 | 김명기 [홈페이지] | 2011-05-30 22:14:59, 조회 : 942 |
편지를 쓰다.
오늘은 편지를 썼다. 그것도 두 통이나. 먼저 요즘 날씨에 관하여 언급하고 안부를 묻는다. 오래전 고교 시절 은사님께 배운 서신 작성법은 내 뇌가 아닌 심장에 새겨져 있다. 나는 이 공식 아닌 공식에 따라 표준형 편지를 얼마나 많이 써 왔던가? 나는 진한 커피를 한잔 머금는다. 진공관에서는 유키 구라모토의 왈츠로맨틱이 꾸준하게 현을 때리고 있다.
먼저 내가 지도하는 학생의 부모님께 편지를 쓴다. 나는 아들을 군에 보낸 아비다. 부모 마음은 부모가 안다. 나는 그의 동정에 관하여 보고하고, 약간의 실수에 관해 같은 부모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용서하기를 청한다. 부모 마음은 다 비슷할 것이다. 나는 그 학생의 부모가 굉장한 배려를 한 것에 대하여 인사를 하고, 감사를 전한다. 그 학생은 반드시 바르게 자라, 이 혼탁한 세상을 조금 더 맑게 할 것으로 믿는다. 어렵지 않다. 부모를 보면 안다.
종두득두(種豆得豆). 나는 말끝마다 한자 성어를 붙이는 꼰대다. 그러나 나도 쉽게 꼰대가 된 것은 아니다. 많은 실패와 실수를 거쳐, 진짜 옛 어른 말씀 하나 틀린 것 없다는 것을 통감, 아니 절감하고 간신히 꼰대가 되었다. 내게 꼰대란 것은, 일종의 훈장이며 계급장이다. 죽을 때까지 꼰대로 살기로 결심한지도 꽤 된 것으로 기억한다.
편지를 접어 하얀 봉투에 넣고 나는 다시 또 한 통의 편지를 쓴다. 군에 있는 내 아들에게다. 아직도 휴가 나오면 어디론가 사라져, 휴가 끝 무렵 용돈 떨어질 때쯤에야 내게 오는 철부지다. 나는 아들의 안부를 묻는다.
[요즘 날씨가 갑자기 더워졌지? 세상에서 제일 춥고 더운 옷이 바로 군복이다. 그래도 그 어려운 시절은 네가 사회에 나오기 전, 확실한 인생 교육을 해주는 복장이니 부모 된 나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고맙구나...] 아마 아들은 질색을 할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질색하건 말건 나는 진심이다. 나와 같은 마음의 부모가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들에게 이번에 휴가를 나오면 반드시 내게 먼저 들러 인사를 여쭈고,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말씀 드리고 나서 자신의 볼일을 보라고 당부한다. 앞으로는 쭉 그래야 한다고 명령도 한다. 아들이 얼마나 따를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내 아들에 대한 대접이다. 내 아들은 이제 어린이가 아니다. 나는 내 아들에게 어른 대접을 해주려는 것이다. 그는 머지않아, 싫다고 해도 세상의 일부를 책임져야 한다. 스스로 능동적이면, 즐겁고 행복한 가장이 될 것이다. 아니면 세상은 그에게 억지로 짐을 지울 것이다. 그것은 이 행성의 모든 남자들에게 지워진 거룩한 운명이다. 사랑스러운 한 여인을, 그 여인이 낳을 자신의 미래를, 언젠가는 늙은 아비인 나를, 사연 가득한 지상의 역사(歷史)를...
나는 이제 편지의 마무리에 골몰한다.
[아들아, 너는 강릉 김씨 평의공파 39대손의 대표다. 너 한 몸에 우리 선조들의 피와 뜻이 오롯이 담겨있다. 아빠를 실망시키지 마라. 또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보살핌도 없다. 그것이 아빠의 행동 철학이다. 반드시 따르기 바란다. 이번 추석에는 우리 부자의 뿌리가 될 선산에서 조상님들께 의미 깊은 약주라도 한잔 올리자. 물론 네가 근무 때문에 못 오면, 너 대신 조상님들께 술잔을 따르는 아빠의 모습을 그리면 될 일이다. 아들아, 너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반드시 책임감 있는 굳건한 우리 집안의 미래가 되어다오. 아빠는 네가 자랑스럽다. 너 역시 곧 자랑스러운 집안의 기둥이 되어 줄 것이다.]
아들에게 꼰대다운 당부를 하던 나는,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는 오늘 광화문 교보 문교 앞을 지나며 보았던 글귀를 찾아본다. 대단하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정현종님의 시 ‘방문객’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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