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글쓴이 | 김명기 [홈페이지] | 2011-03-29 08:35:50, 조회 : 1,132 |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이제 내 동창들은 50대 문을 열고 들어선다. 20대엔 내가 50대가 된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시간은 내가 상상을 하건 말건 꾸준히 간다. 냉정하고 잔인하다. 어쨌든 30~40 대의 직진성이 조금 부드러워졌는지, 요즘엔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는 회수가 좀 늘었다. 그래봐야 두어 달에 한 번뿐이지만.
친구들이 모여 입을 모아 하는 말은, ‘우리는 참 운이 좋았다.’ 라는 말이다. 우리는 기타를 들고 캠퍼스에서 막걸리 마시며 캠퍼스 라이프를 즐길 수 있었다. 나는 1학년 겨울 방학 동안 2달간 막노동을 해서 방하나, 부엌, 욕실까지 딸린 집을 학교 근처에 얻을 수 있었다. 아마 지금 학생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C밭에 D를 뿌려도 취업 걱정을 별도 하지 않았다.
40여명의 졸업생 중에, 50% 가까이가 대기업에 취업했고, 나머지 인원 회사를 고르느라 걱정이었지, 취직 안 될까봐 걱정하지는 않았었다. 요즘엔 굉장한 이력을 만들고도 쉽게 취직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밴드도 하고, 공연도 하고, 데모도 하고, 연애도 하고, 연구도 했다. 군 때문이 아니라면 거의 휴학하는 일이 없었다. 이런 일들을 어느 특정 학생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넘치는 에네르기를 덜어내려 덤벼들었던 일들이다.
새로 회사를 개업한 친구가 무겁게 말문을 연다.
“내가 다니던 H기업 있지? 이제 내 동기는 2명밖에 안 남았다. 이제 50인데 벌써 다 밀린 거지. 예전엔 전관예우라고, 하던 업무 좀 떼어줘서 먹고 살게 해주더니 그것도 없다. 나가라면 그냥 나가야돼. 지금 나가면 명퇴금 좀 주고, 지금 안 나가면 그것도 없어.”
“I.M.F. 때나 그런 줄 알았더니, 요즘도 그래?”
“실은 I.M.F. 때부터 계속 불경기라는 거 아니냐? 게다가 요즘엔 미국서 공부한 2세 사장들이 돌아와서 나이든 임원들에게 묻는 거야, 왜 우리 제품은 글로벌 리더가 되지 못하냐고. 그럼 공장에서 잔뼈가 굵은 직원들은 그러지. 그건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절대 안 됩니다. 그래 놓고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보는 것이 공장임원들 생리거든. 하지만 미국식 사고방식을 가진 2세 사장들은, 그래요? 나가보세요. 그게 전부야. 그리곤 인사조치 되는 거지.”
“S 기업에서도 의사결정 때까지는 집중 토론하고 일단 진행이 결정되면 반대파들은 다 다른 부서로 배치 한 대며? 일에 뒷다리 잡지 말라고.”
“맞아, 그리고 사장단은 자기보다 나이든 임원들 부리기도 껄끄럽겠지. 그래서 양수겸장으로 임원들 처내는 거야.”
묵묵히 듣고 있던 공기업에 근무하는 친구가 무겁게 입을 뗀다.
“이젠 공기업도 좋은 시절 다갔다. 정부가 사기업의 효율적 경영을 도입한다고 사기업 사장을 공기업에 앉혔거든. L 기업에 있는 그 친구 알지? 우리 사장이 바뀌었다니까 전화가 온 거야. 너희 이제 죽어났다고. 모든 임직원을 연수원에 불러 정신교육과 체력 훈련을 시키는데, 이게 전두환 정권의 삼청 교육대 수준이라고. 난 농담인줄 알았지.”
“정말 그래?”
“그런데 내 바로 앞에서 끝나버렸어. 사람이 둘이나 죽었거든. 물론 직접 현장에서 즉사 했으면 난리가 났겠지만, 여하튼 그 연수와 연관되어 인사사고가 난 뒤로 갑자기 중단된 거야. 노조에서도 야단법석이었지. 사람이 죽을 정도로 재교육 시키냐고. 우리 또래들은 한둘로 서서 정중례로 인사를 하는데, 리듬이 딱딱 안 맞는다고 하루 종일 90도 인사를 했다는 거야. 그걸로 허리가 나가서 아직도 병원 다니는 친구도 있어. 실은 말이야,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지원한 사원들도 있어. 정말 억울할 거야. 허허허”
이제 50. 아이들 대학 다니거나 군대 갔을 나이. 뭔가 새로 시작하기에 만만치 않은 나이. 곧 아이들 혼례, 노후 자금 준비로 한창 힘쓰고 돈 벌어야 할 나이. 그 나이든 또래들이 얼굴이 시뻘개 지고, 땀을 뚝뚝 흘리며 백화점 직원처럼 절을 하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나도 모르게 소주잔으로 손이 간다. 왜 그래야만 하나? 왜 회사에 목을 매고 매달려야 하나? 그래서 우리의 푸른 꿈은 과연 이루어 질 것인가? 생떼 같은 자식들과 평생 나만 믿고 산 가여운 아내. 그들에게 내가 한 모든 약속은 지켜질 것인가? 나는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인가? 정말로? 나 죽기전에?
“요즘 애들 취직 때문에 고민하지만, S기업은 취직하면 6개월 이내에 20% 이상이 사표 쓴대. 월화수목금금토 래더군. 일요일에 윗사람들이 컴퓨터 끄고 나가면 그때서야 슬그머니 집으로 가서 모처럼 저녁 시간을 가족과 함께 한다는 거야. 실제로 시간당 임금으로 나누면 S기업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낮은 임금일거래. 정말 살인적인 회사생활이지.”
어찌된 일일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영향력 없는 50대의 한 중년은 도무지 이 세상의 변화를 감당하기 어렵다. 물론 40여 년 전 ‘새소년’에서 보던, 서기 2000년이 되면 자동차들이 날아다니는 만화 같은 세계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 청년이 2달 일하면 얻을 수 있었던 방을 이젠 1년을 일해도 얻기 어렵다. 집 장만 하는 기간은 점점 광속으로 멀어진다. 인생을 시작하는 시기엔 진입장벽이 높아져 가고, 인생을 정돈하는 시기엔 죽도록 일해도 도무지 모든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삶의 질이란 면에서 이 행성의 삶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그 정도는 점점 더 황폐해 진다. 대학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입사 경쟁에 시달리고, 간신히 회사에 입사하면 죽기 살기로 월화수목금금토를 해야 하고, 중견 간부가 되면 아이들 살림나기 전까지 목을 매고 달라붙어야 한다. 부모가 퇴직 전에 결혼해 주는 것이 얼마나 큰 효도인지 아이들은 알기나 할까? 축의금이나 부의금 액수가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삶과 소유. 하지만 그 소유라는 것이 점점 더 터무니없어 진다. 세상엔 아이들의 힘찬 탄생 울음소리와 젊은이들의 웃음이 넘쳐야한다. 가족과 함께 여가를 보내고, 전원에서 재충전해서 또 힘차게 일주일의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 그게 마땅히 기본인데, 그게 희망이 되고, 그게 꿈이 되고, 그게 점점 만만치가 않아진다.
눈자위 새 파랗던 그 청년들이 이제 50이 되어 소주잔을 기울인다. 삼겹살 몇 점을 앞에 두고 지난 시절을 회고하며 껄껄거린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대로 간신히 잘 살아 왔다는 위로일지도 몰라. 하지만 웃음 속에 남은 앙금은,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다. 이 행성의 내년, 또 그 다음 해엔 뭔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우리들 낮은 대화에서 참 찾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네...[남진]
송화마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