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분명한 행복들.
글쓴이 | 김명기 [홈페이지] | 2011-03-06 18:00:27, 조회 : 952 |
사소하지만 분명한 행복들.
비 개인 4월의 오후 3시 30분. 백화점 지하에서 산 맛있는 햄. 등나무 바구니. 미술관으로의 피크닉. 이루마의 피아노 연주 같은 햇살. 맵고 달콤한 떡볶이. 어쩌다가 와인한 잔.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미소 짓는 당신의 볼. 남산국립극장의 자판기 커피와 활짝 핀 수국.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 처음 만난 날의 모엣샹동(Moet Chandon)
봉긋하게 솟아나는 개나리 꽃봉오리. 달 아래 수줍게 머문 백목련. 침대 위 코끝을 갉작이는 2개월 짜리 아기 고양이. Skopi 의 600일 기념 달력. 눈처럼 쏟아지는 아카시아 꽃송이. 손을 마주 잡고 장미향기 가득한 시골길을 따라 하염없이 함께 걷기. 목로주점에서 동동주 한잔. 팔을 스치는 미지근한 바람. 잠든 베개머리에서 멀리 들려오는 기적소리. 이른 새벽 전율로 다가오는 둔중한 첼로 연주, 카잘스의 바하 무반주곡 4번 사라반드(Sarabande)
초여름의 물방울무늬 파란 원피스. 굵고 하얀 머리띠. 프린세스 탐탐의 비키니. 캐러비안 베이의 파도. 목이 따가울 정도로 차가운 생맥주 500CC. 정동진의 바닷바람. 영진의 새 하얀 등대. 당신이 커다랗게 싸서 입에 넣어준 상추쌈. 열무김치 비빔밥. 통통 소리가 나는 수박 한 덩이. 새파란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뭉게구름. 아스팔트의 열기를 식혀주는 소나기. 비 오시는 날의 김치전.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해변으로 가요.’ 시장의 참외장수 곁 노점에서 산 알로하셔츠. 그늘 좋은 플라타너스 아래 느긋하게 흔들리는 해먹. 제주도의 푸른 밤. 협제의 에메랄드 빛 해안선. 파도소리가 밤새 창을 두드리는 해변의 통나무 집. 아람드리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는 청주의 진입로. 찜통 속 도시탈출, 냉수 샤워. 개울에 발 담그고 당신과 함께 듣는 매미소리.
8월 16일의 해변. 삼청동의 은행나무 길. 격자무늬 창이 예쁜 오래된 카페. 슈베르트의 린덴바움. 별이 쏟아지는 평창 목장의 밤. 오대산의 솔숲에서 불어오는 초가을 바람. 가을이면 찾아오는 벗들. 텅 빈 들녘의 화톳불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 오렌지색 모닥불에 구운 감자 몇 알. 부산가는 새마을 호. 찰캉거리며 지나는 시간의 마디를 느끼게 하는 식당 칸의 맥주 몇 병.
커피 빈의 에스프레소. 바스락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 이브몽땅의 고엽. 길가의 빵집에서 무심코 샀는데 의외로 맛있는 크로아상. 누군가가 선물한 향이 좋은 카모마일 차. 같이 산 첫 중고 자동차. 작지만 처음으로 입주한 내 아파트. 양은냄비 속에서 끓고 있는 라면. 처음으로 성공한 된장국. 미다니엘베의 유칼립투스향 버블배스. 아아 하얗고 조그만 당신의 등. 커다란 타월로 몸을 감싼 당신. 인도사람처럼 터번을 두른 당신의 화장기 없는 얼굴. 거울을 보며 입술을 그리는 당신의 뒷모습.
낡은 진공관 앰프. 늦은 밤 함께 듣는 L.P. 스탄게츠가 흥얼거리는 The Girl From Ipanema. 성탄절의 꼬마전구. 조그만 크리스마스트리. 귀가 떨어질 것 같이 매운바람 부는 날, 출근길에 씌워준 털모자. 가방 속에서 발견한 벙어리장갑. 퇴근길을 한발자국씩 따라오는 보름달.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 불을 켜자 모니터에 붙어 있는 노란 메모. ‘사랑해요. 알고 있어요? 바보.’
첫눈. ‘눈이 와요.’ 라며 걸려온 당신의 전화. 설원을 달리는 낡고 믿음직스러운 지프. 햇살을 고스란히 머금은 채 잘 마른 이불. 감기로 끓어오르던 이마를 식혀주는 당신의 서늘한 손길. 코끝이 아프도록 차가운 새벽의 첫 담배. 무쇠 난로 장작불로 갓 구워낸 군고구마. 방금 눈물이 그친 당신의 눈동자. 괴로운 어느 날, ‘당신이 옳아요.’ 라고 말하며 잡아준 따스한 손.
달빛이 너무 아름다운 밤 공원 그네. 피곤한 퇴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산 귤 한 봉지. 눈 내리는 겨울밤의 군밤 몇 알. 꼼짝도 하기 싫은 날의 피자배달. 10분 전에 조율한 피아노 뚜껑을 열고 물방울처럼 튀어 오르는 해머들을 들여다보기. Secret garden 이 눈물처럼 뚝뚝 흘리는, Song from a Secret garden과 함께 조용히 번지는 메마른 먼지 냄새.
싸운 뒤에 도착한, 고물 타자기로 쓴 편지. 빈 손에 남아 있는 당신 가슴의 온기. 아침 일찍 눈 뜨기 전 다가오는 첫 키스. 기억 속에 남긴 흑백사진들. 그리고 오들오들 떨며 함께 맞는 새해 첫 일출.
내 삶에 생명을 주는 사소하지만 분명한 행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