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人(미인)
글쓴이 | 김명기 [홈페이지] | 2011-01-10 21:55:45, 조회 : 1,558 |
美人(미인)
요즈음 가끔 도시로 가면, 일년 單位(단위)의 인사를 자주 한다.
“야아~ 일년 만입니다.”
大蝦(대하)를 튀겨낸 뒤, 긴 나무젓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튀기고 있던 서린의 이부장님은 커다란 배기구 앞에서 손목을 가볍게 놀려 튀김에서 기름방울을 빼며 인사를 건넸다.
아니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얼음처럼 차가운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희미한 기억의 꼬리를 잡고 되새겨 보니, 이미 일년도 넘어 14개월이 되어가고 있었다. 때로 도시에서 지나간 시간과 숲에서 지난 시간을 비교하여 보면 뚜렷한 현실적인 境界(경계), 그러니까 돌로 된 담장이라든가, 수비가 엄중한 국경 같은 초소와 위협적인 제복을 입은 근엄한 표정의 감시병이 물론 없는데도 양쪽의 위치에서 각각 시간은 뒤틀려 있다.
숲 속에서의 시간은 단위가 굵다. 계절이나 비, 바람, 눈 등의 뚜렷하고 직관적인 里程標(이정표)들로 시간의 움직임을 그때그때 알 수 있다. 아마 2~3달 단위의 걸음걸이 일 것이다. 도시에서의 시간은 그보다 훨씬 조밀하고, 여름날 하늘을 가득 덮은 먹구름이 폭풍의 두려움을 싣고 움직이는 속도로 빠르게 흘러간다. 분 단위, 초단위로 시간은 해체되고, 분해 된다.
아주 오랫동안 도시에서 늘 바쁘게 살았지만 범람한 강물을 보면 물결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는 없었다. 때로 벚꽃이 지고, 은행잎이 노랗게 鋪道(포도)를 채우거나 가을이 되어 Dark Blue로 짙어진 강물을 바라볼 여유가 생겨나면, 그제야 한꺼번에 몰려온 시간들로 가로수 아래에 서서, 얼굴을 가린 담배연기 속에 한동안 당혹해 하곤 하였다.
그러나 도시에서나 숲에서나 달력은 동일한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는 것이고, 그저 서로의 위치에 다가가는 정도의 誤差(오차)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면서
살아간다고 하여도, 도시는 잠시만 벗어나 있어도 異邦人(이방인)을 양산한다. 며칠만 도시의 경계밖에 나가 있어도 그 시간에 기하급수적으로 비례하여 이방인의 위치로 몰아댄다.
늘 보던 거리의 간판이 내려가거나 또는 올라가고, 추억이 깃 든 장소들은 거친 공사 중의 안내표지로 소멸된다. 누군가는 새로운 희망으로 일을 만들고, 또 누군가는 깊은 좌절의 늪에 빠져드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그래야 할까? 의 당위성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요컨대, 어쩐지 편안하지 않은 곳으로 자꾸만 변해 가는 거리와 예전의 익숙하던 얼굴들 역시 이미 그런 식으로 해를 넘기고, 망각의 강으로 조금씩 침수되어 눅눅하게 습기 찬 추억의 냄새가 코끝에 머무는 그런 우울한 관계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뚜렷한 모습으로 숲의 일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살갗에 닿는 바람의 溫氣(온기)가 변하고, 별자리가 이리저리 바뀌고, 숲이 표정을 몇 번이고 바꾸는 사이에 나와 세계는 양측이 모두 변화했다. 시간의 흔적이란 그런 것이다. 무척 생경하고 쓸쓸한 일이지만 대안은 없다.
“그래 오늘은 얼굴을 좀 보자. 시력교정을 좀 해야 할 때인 것 같아.”
보그雜誌(잡지)에서 장어 같은 동작의 캣워크로 방금 걸어 나온 듯한 아름다운 그녀를 만날 때에는, 나는 늘 시력교정을 운운하는 오래된 농담을 하곤 했다. 함께 걸어가면 공간이 일그러지기라도 것처럼, 일본 해군의 깃발 같은 방사형태로 시선을 모으는 확실한 美人(미인)과의 커피한잔. 그러나 그저 부드러운 커피 향이 머무는 관계일 뿐이다. 서로의 삶이 늘 예정과는 다르게 무거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탓에 결국 우리의 만남도 일년이 다 되어 간다.
은빛 브리지를 넣은 굵은 웨이브. 풍성한 머릿결의 그녀는 꽃무늬 프린트의 샤넬 라인 스커트 아래로 깎아 놓은 듯 윤기가 흐르는 맨 종아리에 라인이 고운 하이힐을 신고 약속장소의 공기를 가르며 나타났다. 어쩐지 Ventures 의 경쾌한 연주곡이 리듬이 치마꼬리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Tequila!
“웬 선글라스예요?”
응. 너같이 예쁜 미인을 일년 만에 만나면서 갑자기 지나치게 강한 시력교정을 하면 시력을 해친다는 W.H.O. 의 경고가 있어서... 곱게 흘겨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 그녀가 커피숍 외부의 테이블들을 한바퀴 돌아오는 짧은 사이, 그녀는 주변 좌석들의 시선을 한 무리 이끌며 천천히 다가왔다. 미인의 미소에는 여유롭고 고혹적인, 어쩔 수 없는 흡인력이 녹아들어 있다. 익숙한 모습이었고, 일년만의 일이었다.
“조금 지쳤어요.”
너도 그럴 때가 있니? 늘 삶을 누리는 쪽에 속하는 여인에게서 듣기에는 묘한 뉘앙스가 배어 나오는 첫 마디였다.
“기네스 한 잔 할래요.”
그래. 그럼 나는 버드아이스, 그리고 우리는 잠깐 마주보고 바늘 끝 같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각자의 취향은 정확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시간과 일상이 때로 햇살에 놀란 말처럼 길길이 날뛰며 全力(전력)질주를 했지만, 지금 앞에 앉은 그녀는 내가 알던 그녀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간 너무했어요. 바쁜 척만 하시고, 할말이 진짜 많았단 말이에요.”
그녀는 조금 뾰로통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바쁜 일이 뭐 있겠어? 말이나 타고 숲이나 뛰어 다니는 사람이... 편안한 익숙함과 시간이 만들어 낸 미묘한 낯설음이 키가 큰 삼각형 맥주잔의 황금 빛 내부에서 떠오르는 氣泡(기포)를 따라 교차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년만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전에, 정말 바뀌어야 하는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봐. 지난 시간 우리가 결심하였던 일들과 수많은 실패들을 돌아보고. 결심을 한다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스스로를 침울에 빠뜨렸던 무모한 결심들은 아직도 상처가 되어 남아 있어.
사람이니까, 살아 있으니까, 뭔가를 변화시켜 보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 같은 것이겠지. 하지만 그 일을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어찌 되었을까? 그러니 이번에 하려는 일은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말고 오로지 스스로의 판단에 맡겨봐. 자신의 상황이란 것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지. 제한된 데이터를 가진, 가장 보편타당한 판단을 종용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어.
삶에서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금새 코너에 몰리게 되지. 여유롭게 작은 즐거움으로 취미같이 시작한 일이 잠깐사이에 엄중한 책임을 물어 올 때도 있어. 아무리 돌아보아도 죽자고 일한 기억밖에 없는데, 내 것 같지도 않은 책임을 물어 온다면 정말 세상 전부가 한통속으로 짜고 나만 괴롭히는 듯한 느낌일 때도 있지. 그때는 이미 重症(중증)이야.
그냥 숲으로 가봐, 아니 굳이 내게로 올 필요도 없어. 가까운 숲을 거닐면서, 찬찬히 생각을 모아 보라구. 하지 않아도 될 일에 애꿎은 결심을 다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일을 하는 것과 이 사람을 돕는 것이 차라리 일을 더 크게 망치는 것은 아닌지. 어디로 떠난다는 약한 소리는 하지 마. 일을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지그시 입술을 다물고 하나씩 순서대로 풀어나가라고.
일의 始點(시점)과 終點(종점)은 오직 너 뿐이야. 당연히 너의 인생이기 때문이지. 라고 나는 누구라도 풍덩 빠져들 것 같은 커다란 눈동자를 지닌, 자유를 꿈꾸는 여인에게 조용히 말을 전하였다.
171센티미터. 선이 굉장히 고운 자그마한 몸매와 시선을 한참이나 머물게 하는, 함께 길이라도 걸을라치면, 누구라도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걷는 발길에 가벼운 바람이라도 일 것 같은 여인이다. 寶石(보석) 쪽의 일을 하는 이 미녀는 지난달 800만원 순 소득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그 전 달은 500만원. 그러니 상황은 점점 더 非現實的(비현실적)이다. 어느 누구라도 이 재색 兼備(겸비)의 미녀에게 고민 따위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매월 900만원, 1,000만원의 지출이 필요한 더더욱 비현실적인 현실이 있다. 그 끈적끈적한 현실이 자꾸만 그녀의 희고 동그란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측백나무 숲으로 오라구. 말이나 타자.
“정말 그렇게 걱정 없이 며칠만이라도 살아보았으면 좋겠어요. 부러워요.”
그래. 그런 건가? 그래도 그렇게 인상 쓰지 마. 자꾸 그러면 보톡스라도 맞으러 가야 하겠어.
“정말요? 이구...”
희고 고운 손가락으로 눈가를 잡아 늘이는 그녀의 표정은 농염함 속에 의외의 천진스러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 여러 가지 면의 얼굴이 모여서 순간순간 번득이는 미인이 되는 것이로군.
“네?”
아니, 혼잣말이야. 몇 병의 기네스를 비우고 우리는 일어섰다. 그녀는 골드카드를 꺼내어 계산을 마쳤고, 걱정이 없는 나는 그저 고맙게 잘 마셨다고 말할 뿐...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외칠 수 있는 갈대밭인지도 모른다. 그럼 내게 있어 그녀는 무엇일까? 어쨌거나, 여러 가지 面貌(면모)로 비현실적인 미녀의 고민을 듣는 다는 것은 그리 고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음엔 J.J.로 가요. 제가 쏠게요.”
아니, 다음엔 숲으로 와. 내가 쏠게. 지난 일년간의 이야기를 내게 남겨 놓은 그녀는 다시 도시의 불 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차에서 오른 발부터 내리자, 다시 주변의 공간은 잠시 일그러졌고, 시선은 일본해군의 깃발이 되어 모여들었다. 백미러 뒤로 싱그러운 미소를 멀리 떠나보내며, 아마 여간한 일이 생기더라도 그녀의 미소는 그리 많이 변질되지 않을 것이라는 단단한 확신이 뇌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잠든 도시와 숲의 경계에 드리운 어둠을 뚫고 돌아온 숲에는 400명의 아이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오렌지색으로 타오르는 거대한 모닥불의 곁에서 인디안을 닮은 몸짓으로 뛰어 오르는 아이들의 숲도 역시 도시의 일상에서 볼 때,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이제 반 넘게 자라난 달님을 담배 한 모금만큼 바라보고 난 뒤, 어쩐지 마음이 텅 비어 버렸군! 하고 나도 모르게 한마디를 허공에다 던지고 말았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응. 서울...
“무슨 일로...”
너 엄청난 미인이 말이야, 한 달에 800씩 벌면서도 고민 투성이라면 어떻게 생각하니?
“에이. 세상에 그럴 리가...”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러나 말이다. 세상엔 그런 일이 있구나... 숲을 지나온 바람이 잠시 가로등 아래를 스치며 지나가자, 밤은 현실과 비현실을 모두 깊은 잠 속으로 깊이 빠뜨려 버리고 말았다.
측백나무 숲을 따라간 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