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쥐 선생님
글쓴이 | 김명기 [홈페이지] | 2010-12-25 20:47:24, 조회 : 1,029 |
생쥐 선생님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음악에 대하여 회상하다 보니, 괴짜로 이름나셨던 음악 선생님이 기억난다. 그분의 별명은 생쥐였다. 앞니가 모 개그맨처럼 삐죽 튀어나오고 얼굴이 무척 검은 분이셨다. 다른 별명은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분은 삐쩍 마르고 성급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너그럽고, 괴상한(?) 행동을 잘 하셨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그야말로 대학진학을 목표로 3년간 학생들을 몰아치는 곳이었다. 제주도에서까지 시험을 치러 학생들이 몰렸고, 200점 만점의 입학시험에 190점대가 전체 수험생의 25% 정도를 차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자율학습까지 매일 오후 11시에 수업이 끝날 정도였다. 당시 우리가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부르던 호칭은 ‘노암산 똘 중들’ 이었다. 그러니 그런 미래지향적 출세 우선주의(?)의 학생들에게 음악수업이란 그저 부수적이고 의미 없는 시간 때우기에 불과했다.
흑백 T.V.는 동네에 몇 대, 지금은 오디오라고 불리는 전축은 한 동네에 한 두 대있던 시절. 언젠가 한 번 지방의 뜻있는 음악 관계자들이, 이제는 없어진 시민 관에서 음악회를 열었다. 그 당시 목련화 등의 가곡으로 이름 높던 엄정행 님을 비롯한 쟁쟁한 성악가들을 모신 것이다.
고명한 성악가들은 곡을 시작하기 전에 몇 번이고 객석을 노려보며, 청중을 진정시켜야만 했었다. 대개 억지로 동원된 중, 고등학생들은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는 꿈에도 모르고, 쭈쭈 바를 입에 물고 떠들며, 앞줄에 앉은 여학생들의 관심을 끌려 휘파람과 헛소리를 일삼았던 것이다. 나중엔 뒤에 앉은 학생들이 쭈쭈 바 껍데기를 앞좌석으로 던져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다. 근엄한 성악가 선생님들이 그랜드 피아노를 짚고 서서 눈알이 빠지도록 노려보았어도 이미 사태는 수습 불능이었다. 실은 그것이 내 인생의 첫 음악회였다.
음악에 관해서는 그런 정도의 우울한 지식만을 지닌 가난한 개발 도상국가의 청소년들에게 지방 고등학교의 음악교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 영악한 지방 고교의 학생들은 물리, 수학 등에서 만점을 받기 일쑤였고, 총점 15점짜리 음악시험에서도 대개는 순식간에 만점을 받곤 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의 타고난 음악적 소양인양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베개보다는 팡세를 끼고 다니는 놈들이 많았을 때였으니까 말이다.
걸풍노도(乞風怒濤 : 배만 고프면 난폭해 지는 놈들이라는 뜻, 슈투름 운트 드랑 [Sturm und Drang]질풍노도에서 비유된 말) 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늘 박학다식한 놈들이라고 (箔學多食: 학문은 은박지처럼 엷고 먹기만 많이 처먹는다.) 놀리던 음악선생님은, 음악 수업을 받으러 음악실에 모인 학생들에게 말했다.
“수험 공부 하느라고 힘들테니 선생님이 틀어 주는 음악을 자장가 삼아 그냥 엎드려 자라. 대신 떠들지 말고 조용히 자라.”
조각조각 부서진 잿빛 기억들을 모아보면 그때 들었던 음악들은, 구노, 슈만, 드볼작, 스트라빈스키, 시벨리우스, 브람스, 바그너, 그리그, 모차르트, 슈베르트, 무소르그스키, 차이코프스키 등을 총 망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 무식한 제자 놈들이 듣거나 말거나 조용조용 설명을 곁들여 주셨다. 틈만 나면 열심히 코딱지를 굴착하던 우리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은, 음악시간만큼은 세계 최고의 음악을 들으며 낮잠을 청하곤 하던 느긋한 팔자였던 것이다. 낙서가 많은 나무 책상에 엎드려 있노라면 무심한 배추흰나비가 창가에 팔랑거리곤 했었다.
가끔 에스파냐의 흥겨운 춤곡을 소개할 때면, 선생님은 잠 든 학생들이야 보건 말건, 수트 윗자락을 허리 섶에 넣고는 집시처럼 춤을 추시곤 했다. 마치 왕정시대의 난쟁이처럼 날렵하게 회전을 하시고, 탭댄스까지 곁들이다가 음악이 끝나면 세련된 태도로 오른 손을 머리 위에서 발아래 까지 빠르게 내리그으며 정중한 인사까지 덧붙이셨다. 마치 바람이 일 듯 멋들어진 연결동작이었다.
하루는 한 시건방진 고삐리가 선생님께 따졌다.
“선생님! 격에 맞지 않으시게 그게 무슨 행동이세요?”
그러나 선생님은 바지를 추스르고 긴 앞니를 하얗게 드러내며 그저 웃으셨다.
“언젠가 너희가 나이 먹으면 이런 음악들이 모두 새롭게 들릴 것이다. 아마 지금 이 지겹고 졸린 시간을 회상하며, 이 음악들을 일부러 찾아 듣게 될지도 모르지. 너희가 이런 음악을 늘 듣고 생활할 정도로 우아한 삶을 살게 되기 바란다. 나는 너희에게 열심히 음악을 소개할 뿐이야. 가능하면 음악을 잊고 살지 않도록 나로서는 최선을 다할 뿐이지.”
대학에 진학하고 미팅이란 것도 하게 되면서, 나는 신촌으로, 명동으로, 성북동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브람스, 와그너 등을 척척 꺼내 놓는 콧대가 하늘만큼 높은 얼굴 새하얀 여학생들 앞에서, 우물쭈물 하면서도 몇 몇 음악가들을 간신히 늘어놓을 수 있었다. 나는 다행스럽게 지방 고등학교 출신이면서도 결코 촌스럽지는 않은 녀석으로 그럭저럭 치부되었다. 그때 생각했다.
“흠. 선생님은 참 실용적인 것을 가르쳐 주셨군. 도움이 된단 말이야.”
이제 나 역시 선생님의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자장가라며 들려주시던 그 음악들을 다시 꺼내 들으며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 시절을 회고하게 되었다. 체면까지 무시하면서 난쟁이처럼 빙글빙글 춤을 추던 그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필사적으로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젠 어림짐작 할만도 하다.
음악은 한 까까머리의 기억 속에 수 십 년간 고스란히 남아, 힘들 때나, 마음 어지러울 때, 충분하고도 확실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때로 음악은 절대로 놓지 말아야할 일종의 기준이 되어 주기도 했다. 누구나 삶에는 그런 것, 일종의 이정표가 필요하다. 가난한 작가로 살면서, 힘센 돈 앞에 쭈글쭈글 조그만 용기가 가시복어처럼 부풀어 오르기를 필요로 할 때면 더욱 그랬다.
그저 듣고 느끼고, 잊지 않기만을 바라던 생쥐 선생님. 음악 선생님, 그분은 지금 생존해 계실까? 그 때 선생님께 따지고 들던 그 시건방진 고삐리가 선생님을 회상하며,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마움을 전해드리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계실까? 그분은 분명히 길쭉한 앞니를 드러내며 웃어 주시겠지.
“조용히 해. 이 자식들아, 나는 니 놈들이 그럴 줄 미리 알고 있었지. 음악이 그리 만만한줄 알아? 평생을 들어봐라, 발뒤꿈치나 따라가나. 그러니 잠자코 입 닥치고 듣기나 해.”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