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보다 소중한 현실
글쓴이 | 김명기 [홈페이지] | 2010-12-17 08:56:51, 조회 : 1,086 |
꿈보다 소중한 현실
어이, 잘 지냈어? 오랜만이네. 응, 지난번에 내가 지적했던 내용, 제대로 잘 하고 있는지 확인 차 연락했다. 응, 문학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좋아 자네는 잘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좀 걱정 된다. 지난번 자네가 등단할 때 그랬지? 등단한 작가가 일만 명인데, 그중 문학으로 밥 먹는 전업 작가는 10명이라고. 그런데 자네가 그 10명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물론 나는 그랬으면 좋겠지만, 짬을 내 글을 쓰는 무명작가인 나도 그 10명이 누군지 모르겠다.
자네가 꿈을 쫒는 것은 나도 찬성한다. 그러나 자네는 자네라는 개인만이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고 부모님의 금쪽같은 자식이다. 나는 S대를 지원하거나 졸업한 많은 친구들과 선후배를 알고 있다. 그 중에 꿈이 줄고 줄어 오히려 남들만도 못한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창창하던 젊음과 패기, 노력을 생각하면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뭐가 잘 못 된 것일까?
자네가 이미 서른을 넘어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할 때니, 나는 꿈을 쫒는 기한을 이야기하고 싶다. 앞으로 몇 년간 더 꿈을 쫒을 텐가? 꿈이나 현실이냐? 양단간에 결심이 필요하다. 지금의 나는, 이름이나 부를 남기는 것 보다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나고, 살고, 후세를 남기고 죽는 것. 그 순환하는 쳇바퀴 속에 오히려 삶의 진리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나이가 들어 생긴 믿음이다. 나도 젊을 때는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을 따라 무지개다리를 건너곤 했다. 돌아보면 무척 피곤한 일이었지.
자네가 꿈을 이루는 것 이상으로, 자네가 예쁜 부인을 만나고, 귀여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부모님들의 희망일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보편타당한 일이다. 그러므로 진실에 가깝다. 꿈을 위해 간단히 포기할 만한 규격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꿈을 일부 접어서라도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다. 부질없는 것이 소유욕이고, 덧없는 것이 명성 따위 아닌가?
요즘 들녘에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다. 논마다 물이 담기고, 그 물에 하늘이 비친다. 농부는 허리를 숙여도 하늘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농부들은 애초부터 거룩할 수밖에 없나? 하고 나는 생각한다. 논에 모가 심어진다. 그 모는 발아부터 추수까지 일 년을 산다. 이것을 영원히 반복하지. 하루살이도. 거북이도, 돌고래도, 코끼리도, 개, 소, 말, 돼지, 갖가지 식물들도 마찬가지다. 그게 무의미 한가? 우리는 인간이라서 다른가? 만물의 영장이라서? 우리도 나고 자라고 후세를 남기고 죽는다. 우리의 문명이나 기술은, 그 과정을 좀 더 편안하고 안전하게 만들거나, 전쟁으로 모조리 학살하는 바보짓을 시계추처럼 반복하게 하는 도구다.
지구의 나이는 46억년으로 추정한다.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만 년 전. 지구의 나이를 하루로 보고 최초의 단세포 생물은 새벽 4시쯤에 나타났다고 치면 인간이 나타난 건 밤 11시58분쯤이다. [빅 히스토리/신시아 브라운 참조] 인류는 2분전부터 존재했고, 인간이 본격적으로 문명을 발전시켜 현재에 이른 시간은 23시59분 59초에서 24시까지. 즉 1초정도 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백년이 길다고? 우리는 단세포 생물과 다르다고? 글쎄... 정말 글쎄다.
자연계의 모든 생물이 나고, 살고, 후세를 남기고 죽는다. 우리의 영원은 이름이나 부가 아니라, 우리의 유전 인자를 통해 영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 씨 톨이 어딘가 까마득한 곳에서 와서, 또 어딘가 까마득한 곳으로 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두개의 거울 가운데 서있는 듯 한 아득함이 느껴진다. 영원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영생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영원히 살고 있는 것이다. 또 우주를 헤매지 않아도 우리는 지구라는 우주선의 우주인들이다. 바로 내가 그리고 자네가 작은 우주다.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대가 끊어진다. 대를 잇는다는 단호한 말이 주는 무게를, 이제는 자네도 느껴야 할 것이다. 부질없는 꿈에 하나의 우주를 소멸해서야 쓰겠는가?
이건 다른 이야긴데, 10여 년 전에 내가 완전히 망해 거지가 되었을 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말똥을 치우며 내 삶을 다시 시작했지. 나는 이모작 인생이라고 가슴을 펴고 큰 소리를 쳤다. 나는 내가 세상에 굴복한 것. 내가 바보짓을 한 것에 대해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3년 만에 강릉에서 어머님을 뵈었을 때. 그 분은 내 손을 잡고 조용히 우셨어.
"아이고 우리 아들, 그 하얗던 신사의 손이..."
나는 말했다. ‘제가 노력하고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니까, 오히려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그건 내 입장이고. 어머님은 그간의 노심초사에 억장이 무너지셨나 봐. 사랑의 무게가 다른 것이고, 삶의 입장이 다른 것이지. 나는 쓰지 않는 크림이라도 잔뜩 발라 어머님께 염려를 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부모에게 자식이란,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모순 덩어리야. 그 모순이 우리의 원죄가 되어 대를 이어 가는 거지. 사랑이라는 이해 못할 촉매로 말이지.
그나마 내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간 준비해 오던 일들이 조금씩 풀려서 이젠 늙으신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맛난 것 드시라고 음식이나 노인네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그래봤자 별 것 아니지만) 것들을 선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은 지난 10년, 나는 참 많이 초조했다. 내 형편이 제대로 풀리기 전에 부모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고. 그러면 돌아가신 분들은 죽어서도 내 걱정을 하실 것이 아닌가. 나는 정말로 그렇게 될까봐 강릉에서 두 분 중 누군가 아프다는 말씀만 들어도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지금도 부모님은 내게 전화하면 먼저 이렇게 말씀한다.
"어떠니, 괜찮니?"
나는 그 막연한 질문에 담긴 염려와 걱정이 느껴져 가끔 짜증을 낸다.
"그럼 괜찮지 않구요. 왜 자꾸 괜한 걱정이세요? 이젠 걱정 하지 마세요."
물론 금방 후회하지. 그 짜증은 바로 내게 향한 것이고, 오래 된 기름때처럼 지워지지 않은 삶의 후회스러운 기억을 향한 것이다. 나는 교만했고, 나는 타락했고, 나는 바보였다. 나는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처럼, 손대면 사라질 아름다움과 그리움을 쫒았다. 게다가 그렇게 죽어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까지 생각했다. 그 무슨 천하의 불효일까? 나는 새벽 2시, 늦게 도착한 중년의 장남을 위해 사과를 깎는, 어머님의 거칠어진 손마디를 보며 무간지옥도 차라리 가벼운 형벌일거다, 라는 후회를 한다. 그래도 다행이다. 나는 후회할 수 있었고 늦었지만 일부는 돌이킬 수 있다.
사람의 인생은 절대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회성과 직진성을 가지고 있다. 후회해도 소용 없는 일도 정말 있는 것이다. 아직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말은 정말로 무서운 일이다. 정말로 후회하고 있는데, 정말로 돌이키고 싶은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악몽에나 나 올 것만 같은 상황.
나는 자네도 가능하면 삶을 후회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부모님들은 아낌없는 사랑으로 자네를 돌봐주셨다.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자네가 부족하지 않도록 무진장 애를 쓰셨다. 나중에 나이 드신 그분들이 안 계실 때, 혹시 자네가 후회할 일이 생기면 절대로 안 되지 않겠나? 나는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부모님께 조그만 마음의 정성을 드릴 수 있다는 것. 그것도 건강 하실 때,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앞으로 몇 번의 생신이 있을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선물해 드릴 수 있을 지를 생각하면 자꾸만 목구멍에 둥그런 것이 메어온다. 나는 나이 들었나 보다.
자네는 지금 여러 가지 혼란스럽고 복잡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이제 곧 간단해지고 명료해진다. 진짜가 아닌 것들은 늘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지. 그런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쫒는 모험이 젊음의 특징이긴 하지만, 자네가 너무 많이 헤매거나 먼 길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돌아가면 또 돌아가는 대로의 인생이 있다. 삶에 무의미 한 것 따위는 없다. 오늘 일어난 일은 반드시 운명이 오래 전부터 준비 한 일이고, 오늘 내가 하는 행동은 또 반드시 시간이 흐른 후에 그 결과가 내게 미치게 된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냥 일어나거나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S대 물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준비하는 한 아우가 생각난다. 그는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데, 그게 수학적으로는 증명이 되는가보다. 물론 우리는 미래를 예상하고 현재 행동하기는 하지.]
그러므로 공짜로 주어진 삶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을 하든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시간이 흘러도 후회 없이 삶을 돌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무료로 생명을 준 신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의무다. 부모님들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뭔가를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자식들이 최선을 다하고, 건강하게 살고, 그 결과를 누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매일 매일의 축제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가장 큰 선물이다. 우리가 만든 작은 영광에 그분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나는 안다. 어쩌면 나는 어쩌면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자네는 적어도 나보다 현명하기 바란다. 나는 자네가 자네의 삶에 최선을 다하길 바라고, 또 너무 늦기 전에 무지개를 쫒는 모험을 포기하는 것도 바란다. 꿈보다 소중한 현실도 있다. 눈앞에 보이는 늙으신 부모님. 눈앞에 보이는 어린 자식이 꿈보다 소중할 수는 없다고, 절대로 없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믿고 있다.
형은 이제 글렀어. 너무 나이든 것 아냐? 라고 자네가 말한다고 해도 나는 달리 할 말은 없다. 이건 머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 가슴 속의 진실이 그럴 것이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리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송화마을에서